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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경험 시리즈 2탄 - 중학교 시절의 재테크 01

인생경험 이야기

by 정필립 2022. 9. 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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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 6학년이 되어서 전학이란 것을 처음 가게 되었다.

부모님이 이혼으로 갈라서면서 아버지를 따라간 것인데

생모를 떠나 계모 아래서 살아보는 고통이 얼마나 힘들지 모르고 그저 긍정적, 행복하기만 했다.

아버지쪽에서 내가 좋아했던 탱크 조립식 프라모델을 몇개씩 사주니까 어린마음에 덩달아 그쪽으로 가는거겠지.

여하튼 생모를 뒤로하고 인천에 주안역에서 버스로 20분 거리인 연수동에 있는 아파트로 이사갔다.

처음에 두달 정도는 머라하는 사람도 없고 참 좋았는데 슬슬 계모의 정신적 태클이 들어오고

십년 넘게 살던 동네를 떠나

친구 한명 없는 인천에서 새로운 친구 사귀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다.

옛날에 살던 동네에선 남녀 가리지 않고 친하게 지내는 동네 벗들이 많았는데

이곳은 아버지 말곤 다 모르는 사람이다. 그땐 그래도 그런가 보다 하믄서 살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로서 가장 하면 안될 일이

애 전학갈 일을 자주 만드는 것이란걸 알게 되었다.

아이 정서에 좋을게 하나 없다.

일단 아이의 자신감이 위축되고, 교우관계는 완전히 끊겨버려서 새로 시작해야하며, 사회성과 공부의욕, 성취욕

모든게 다 감퇴되는 것 같다.

뭐 아닌 특출난 친구도 있겠지만 지금 부동산 공부를 열씸히 해온 내 입장에선

아이의 정서가 발달되는 시기에

부모가 이혼을 하고 전학을 밥먹듯이 하게되면 아이의 미래가 참담해지는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되었다.

여하튼 난 내 부모님들 처럼 살지 않고 내 아이에겐 그러하지 않으리라가 내 신조다.

난 국민학교 6학년에 전학을 총 3번 다녔다.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인천 연수동으로,

인천 연수동에서 서울 노원구 중계동으로

중계동 내에서도 또 한번을 전학 다녔다.

뭐 항상 새로운 환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은 나름 즐거웠는데

어짜피 좀있다가 전학다닐꺼 친구사귈 마음의 여유는 없던 것이다.

 

아버지는 직장에서 항상 늦게 오셨고, 계모랑 항상 같이 있던 나는

계모의 압박에 대한 스트레스에 못이겨 밖에 나와 혼자 노는게 일상이였다.

아버지쪽에 온지 3달이 지나서 용돈이 끊겼다.

계모가 뭔가 밉다고 용돈을 안주기 시작한 것이다.

중학교를 진학하면서 매점에서 맛있는것 사먹는 용돈이 풍족한 동급생 친구들이 참 부러웠다.

그당시 건설업 하는 집안의 친구가 나의 절친이였는데

그친구도 프라모델을 좋아해서 나와 잘 어울리고 지금도 연락하며 지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덕에 매점에서 200원 짜리 아이스크림을 잘 얻어먹고 다녔는데

마침 돈을 모을 수 있는 찬스가 생겼다.

아버지와 새어머니가 논의끝에 중랑구에 있는 친척네 학원에 보내기로 한것이다.

용돈은 여전히 없고 딱 지하철비 + 버스비로만 지급받았다.

그당시 서울시 중고생 버스비가 300원 선이였고 정확하게 기억은 안나지만

300원 또는 160원 짜리 버스토큰 두개 넣고 버스를 탓던 것 같다.

없는 용돈에 18000원 짜리 탱크 프라모델이 너무 사고 싶은 나는

이때부터 최초의 재테크 계획을 세워 실천하게 되었다.

지하철비는 못아끼더라도 버스비는 아낄 수 있는 비법이 있었으니...............

그것은 300원 모두 10원짜리로 바꿔서 한방에 버스 탑승구쪽 동전 투입구에 때려 넣는것이다.

그러면 하루 30원정도씩은 덜내고 탈 수 있다. 예를 들어 버스비는 300원인데 십원짜리 27개(270원)을

넣고 타는것이다.

어떨땐 한번에 100원 넘게 아낀적도 있지만 버스 운전기사 아저씨들이 알면서도 눈감아 줫던 것 같다.

이렇게 하루 평균 30원 이상을 600일 정도 모으면 18000원이 모아진다.

매일매일 버스비 얼마를 절감하였고 내가 얼마 모았다는걸 다이어리에 기록하며 개인적 만족을 얻어나갓다.

결국 18000이 아닌 3만원 이상을 모으며 목표하는 탱크 말고도 한대를 더샀다. 한 1년이상은 걸렸다.

재테크의 가장 큰 기본은 새는돈을 막는것이고, 쓸떼없는 지출을 줄여 목돈으로 만드는 것이다.

애써 모은 돈을 오락실에 넣거나, 먹고 싶은것을 참아가면서

악착같이 모아 목표액수를 만드는데 성공 한 것이다.

이 목표를 이룸으로서 나는 굉장한 성취감을 느겼고 그탱크 프라모델 박스를 볼때마다 자랑스러웠다...........

그러나 그렇게 힘들게 모아 만든 탱크를 계모에게 걸려 폐기처분 당하고........

거기에 집안내 저금통에 돈이 몇백원 없어져서

나를 싫어하는 계모에 의해 내가 훔쳐갔다고 포장되어 크게 혼이 났었다.

아직 어렸던 나는 몹시 분한마음에 이불에 짐을 싸들고 집을 나와 하계동에 있던 할머니집으로 도망쳤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것도 아닌데 참 .............

그당시 내 입장에선 전재산 모아 산 아파트를 누가 경매로 꿀꺽 하고, 하지도 않은 짓으로 깜빵 가게된것과

다름 없기도 했다.

노원구 중계동에서 1년 좀 안되게 있다가 아버지가 경기도쪽 현대모비스에 이직하면서

경기도 의왕시 오전동에 있는 개나리 아파트로 이사를 갔다.

지금은 경기도 의왕시가 많이 좋아졌다지만 97년도 그당시엔 미개발지가 대부분인 완전 촌같은 동네...........

의왕중학교에서 한 3개월 다니다가 공부가 하고싶어 학원을 보내달라 하였고,

마침 계모가 동생을 임신을 하게되어 태교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할머니네로 쫒겨나가게 되었다.

나는 노원구 중평중학교를 다니다가 경기도 의왕중으로 전학을 갔고

3개월뒤 다시 노원구 중평중학교로 그것도 같은반으로 전학을 왔다. 진짜 희안한일

마침 공석이 있던 자리가 내가 빠졌던 그자리였다니 놀라웠다.

물론 다시보는 반친구들이 반갑게 맞이를 해줘서 행복했다.

할머니집은 그당시 노원구 하계동에 있는 시영아파트로 복도식 15층 아파트였다.

지금보면 대지지분이 큰 진짜 옛날 아파트로 지금은 하계 장미아파트로 이름이 바꿔져 있다.

노원구내 역세권 재건축 유망주 중 하나이다.

친할머니네에서 중1~중2 가을시즌까지 보내면서

맨날 라면에 밥과 김치가 주식이엿는데 마냥 행복했다. 학교등교시 받는 도시락엔 밥+김치만 있었고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깐 친구들 틈바구니에 껴서 마음착한 친구들 반찬을 나눠먹으면서 나름 즐겁게 보냈다.

그래도 친할머니가 맨날 용돈 3~4천원씩 챙겨주셨기에 돈을 모아 사고싶은 탱크 프라모델은 다 샀던거 같다.

친할머니가 보험 연금외에 뭐로 돈을 벌었냐면 지금은 레드오션이 된 폐지줍기, 폐병 줍기였다.

그당시 완전 블루오션으로 할머니는 이걸로 매일 2만원 이상은 버셨다.[96~97년 당시 일당 2만원이면 꽤 큰거]

덩달아 나도 병줍기에 나섰으니.................가장 고수익 줍기는 바로 델몬트 유리병이였다.

무러 한병이 150~200원 정도나 쳐줫기 때문에 돌아다니다 하루에 적어도 4병 정도는 주워다 판거 같다.

요즘 델몬트 병이 만원이 넘는다니 ㅎㅎㅎ........... 아 옛날이여

김영삼 정부시절 IMF 직전 중고 고철/폐지/병 가격이 나름 몸값이 형성되었나 보다 싶다.

여하튼 차곡차곡 쓸떼없는데 잘 안쓰고 현금을 모아다가 목표로 하고 싶은것을 사는

재테크의 기본기를 이때 익히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근검절약과 들어오는 돈을 최대한 덜 피곤한 방법으로 늘리는 법이다.

가혹한 환경속에 재테크의 기본 비법을 알게 되었으니 공부보다 돈모으기가 훨씬 잼있었고

당연히 공부는 나와는 거리먼 이야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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