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경험 이야기

인생경험 시리즈 5탄 - 고등학교 시절의 재테크 02

정필립 2022. 9. 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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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밀레니엄이 되던 2000년, 나는 그때 고등학교 2학년으로 여전히 가정사도 힘들고 사정사정하여

하반기부터 배달알바와 용산에서 컴퓨터 부품을 취급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드디어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긴것이다.

돈버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 덕분에 학교 수업시간에는 졸음이 쏟아졌다.

공업고등학교 2학년 수업은 기술관련 교육이여서 실습시간에는 집중하여 열씸히 수업에 참여는 했었다

나는 전자기계 전공을 선택하였기에 '오토캐드' 라는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도면을 그리거나,

직접 종이 위에 자와 연필로 제도를 하는 연습을 하였다.

그리고 공학의 4대 역학 중 고체역학, 유체역학 2가지의 일부를 배우게 되었다.

나는 이 수학 / 물리에 대한 내용이 재미있어서 역학공부를 열씸히 했고

공업고등학교에서 나름의 노력이 후에 말하게 될 대학교시절 2~4학년에 공부와

수많은 자격증 공부에 기초수련이 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후술하겠지만, 나는 목표를 가진 꾸준한 자기개발이 결국 통찰력

즉, 인사이트를 기르는데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부해서 남주냐!]

중학교 시절 성적이 내앞에 있는 친구들이 내뒤에 있는 친구들 보다 훨씬 많았던 내가

드디어 공부에 흥미를 느끼고 변화를 모색한게 바로 이때인 것 같다.

그리고 꾸준히 '디아블로2' 를 하면서 아시아서버, 유럽서버에서 플레이어 보단 아이템 상인으로서

입지를 구축하였다.

일하면서 현금도 모으고, 게임 상의 재산도 늘리며 재테크에 대한 나만의 세계관을 열씸히 구축하였다.

공부 잘해서 영재고 갔다는 옆집친구, 학교에서 전교 10등 안에 든다는 엄친아 등등

나와는 먼 이야기를 자주 들었으나, 남과 비교하며 자신에게 실망하기 보단 현재에 충실하였고

1호선 지하철을 타면서 한강대교 넘을때 마다 용산의 동/서부이촌동 한강변에 있는 집들을 보며

'내 언젠가 죽기전에 반드시 성공해서 저기에서 살아보리라' 생각을 그때부터 꾸준히 하게 되었다.

아무튼 그 뉴 밀레니엄이던 2000년 무슨일이 있었는가? 바로 남북 정상회담이 있었다.

정주영 회장께서 천마리의 소떼를 몰고 98년 방북한 것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 - 김정일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있었다.

나와 내친구들은 '우리 이대로 가면 군대 안가는거야?' 하면서 마냥 좋아했고

국가적으로 남북교류 활성화를 위해 개성공단, 금강산개발, 남북연락소 건설을 추진하였다.

그 당시 북한의 저렴한 노동력을 이용해 상품을 만들어 수출하면 큰 이윤이 예상된다는 언론보도도 많았다.

나는 군에서 남보다 오래 근무하였고 현재도 '예비역 대위' 이기에

북한을 절때 우리의 안정적인 파트너로 보지 않지만, 북한의 활용에 대해 굉장히 관심이 많다.

이명박 - 박근혜 대통령때 나온 통일 대박론이 괜히 나온것이 아닐것이라 믿고 있다.

현재는 남북 관계가 과거로 돌아갔지만 다시 교류가 활발히 되어 연방국가처럼 북한출입이

자유롭게 되길 희망한다.

그렇게 뉴 밀레니엄이 되던 때

공부에 대한 감도 잡고, 재테크 감각도 발전시키며, 직접 일을 하면서 돈을 벌고,

시대변화에 내 나름의 평가를 내릴 수 있는 능력이 조금씩 생겼다.

그 다음해 2001년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대학 입학보단 일을 하며 돈을 많이 벌고 싶었고, 고등학교에 재학중인 상태로 가리봉역 근처에 위치한

필기구를 생산하는 공장에 취업을 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가리봉역은 2005년 하반기 부터 가산디지털단지역으로 개칭이 되었고,

일대 공장이 싹 없어지고 지금은 '지식산업센터'라 불리는 아파트형 공장이 잔뜩 들어섰다.

가리봉동의 행정구역은 금천구로, 이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나오는 수많은 회사들의 법인 소득덕에

금천구의 세원이 어마어마 올라가서 금천구청도 아주 호화롭게 지었다는 풍문이 있을정도이다.

아무튼 취업한 공장은 대부분 생산직이 여자사원으로 고등학생 영계 남자가 입사했다는 소문이

회사내로 퍼져 공장내 누나들에게 호시탐탐 노려지게 되었다.

그중에 정말 예쁜누나도 있었지만 난 연애보다 우선순위가 많았기에 도통 관심이 없었다.

나는 볼펜팁을 가공하는 기계장비쪽 부서에서 일을 했는데 기계로 금속을 깎아내는 소음이 꽤 컷다.

그래도 나름 청소와 일도 열씸히 하고 똘망똘망한 모습을 보여주자

그곳 임원으로 계신 공업고등학교 대선배께서 나를 따로 부르셔서 면담시간을 가졌다.

임원으로 부터 "너는 뭐가 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았고 나는 잠시 생각 한뒤

"저는 성공하고 싶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고등학교 대선배께서 "너가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이냐?" 라는 질문을 다시 던졌고

난 그에대해 전혀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 나에게 임원께서 "1달 시간줄테니 너가 생각하는 성공이 무엇인지 정리해서 보고해라" 라고 하시며

일터로 복귀하여 계속 수고하라고 하셨다.

기계앞에 앉아서 멍때리며 생각에 잠긴 나는 '성공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곰곰히 생각을 하였다.

이 고민은 한달동안 계속되었다.

한달 뒤 대선배께서 다시 임원실에 나를 불러 내가 생각하는 '성공'에 대한 보고를 받으셨다.

"전무님 저는 전무님처럼 좋은 대학 나오고, 강남에서 살고, 좋은차 끌고 다니고, 높은자리에 가고 싶습니다" 라고 보고를 드렸다.

그 자리에서 대선배께서는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지 계획을 세웠는가?" 라는 말에는 또 답을 못했다.

그래서 또 시간을 줄테니 고민 후 보고하라 하셨다.

내가 성공하기 위해 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깊이 고민을 하면서 내 나름되로 성공의 액션플랜을 계획하였다.

그러다 보니 이미 성공한 나의 모습이 상상되어 내안에 있는 새로운 '회로'가 동작하며

피가 끓기 시작했고, 먼가 흥분되기 시작했다. 계획되로 성공하면 너무나 멋지지 않겠는가!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그때의 이런 고민이 나의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 놓았다고 확신한다.

어떤 사람이든 뭔가 성취를 위해선 스스로의 알을 깰 계기가 필요한데, 그 계기를 스스로 만든 것이다.

다시 대선배께 보고하는 자리에서

"대학입학을 준비하여 좋은 대학가서 더 공부하고, 부자가 되기 위해 돈공부를 하겠습니다." 하고 하였고

선배께선 "대학교? 좋다. 이왕 하는거 일류대를 목표로 해라.

그리고 부자가 되려면 부동산을 알아야 한다"라고 하셨다.

나의 가장 큰 장점은 일단 하기로 마음먹으면 미루지 않고 반드시 실행한다는 것이다. 죽이되던 밥이되던 말이다.

그 다음부터 볼펜깎는 공작기계 앞에 책을 놔두고 공부를 시작했고, 퇴근하면 바로 도서관으로 향했다.

부동산도 틈틈히 관심을 가지며 알아보게 되었다.

공부할 분위기가 전혀아닌 집단속에서 먼가 해보겠다고 덤비는 한참 어린 후배가 기특했는지,

선배께선 자주 세상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그 선배께선 명문대 출신으로서 당시 강남쪽에 부동산을 여러개 가진 분으로

특히 도곡동 주택개발에 관심이 엄청 많았던 분이셨다.

IMF 여파가 끝나지 않았기에 부동산은 가지고 있으면 바보라는 소리가 숱하게 있었던 분위기속에

동년배 친구들도 나의 부동산 부자를 향한 포부를 듣고 "애 갑자기 이상하다" 는 반응이였다.

 

2001년 기억나는 사건은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에 테러가 발생된 날이다.

후에 911테러로 기억되고 있는 이 사건당일과 그 이후 회사에 노동운동을 하는 빨간띠 두른 남자선배들이

미국규탄, 정권규탄을 하는 모습을 자주보게 되었다.

나는 아직 어리던 터라 정치나 사상쪽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같이 빨간띠 두르고 투쟁대회에 나가면 일당 2만원 챙겨준다고 하길래 따라가 봤다.

땡볕에서 반나절 노동운동을 해본결과 그 시간에 '공부'를 더하는게 더 득이된다는 생각이 들어

이후로는 일체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던 2001년 대학수능을 치뤘고, 원하던 점수는 전혀 나오지 않아 일단 상위권 대학교 진학은 불가능했다.

남들은 고1때 부터 내내 공부했지만 난 공부와 거리가 먼 공업고등학교 진학자이고 그나마 고3 때 부터

일하면서 '공부' 란 것을 스타트 했기에 단시간에 상위권 대학 진학은 불가했다.

이듬해 2002년,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교 한곳에 등록하여 대학교 1학년으로서 대학생 생활을 시작 하였으며

목표로 하는 대학은 동년배들보다 한 학번 늦게 가는 방향을 택했다.

그리고 다니는 회사를 퇴사하고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하게 된다.

또한 이때 강남권 부동산 투자를 처음 도전하게 된다.

그간 내간 모은 쌈짓돈 3천만원 정도와 어머니의 남는돈 4천만원을 합쳐

마침 미분양이였던 강남구 도곡동의 한 주상복합을 전세놓는 조건으로 매수하게 된다.

'타워팰리스'라 불리는 이 주상복합 아파트 매수는 내 인생의 관점에 있어 가장 중대한 영향을 준 사건이다.

'자산투자'이라는 개념을 처음 알게 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당시 '타워팰리스'는 고분양가로 인해 미분양이 다발로 발생한 건설사의 무덤이였다.

삼성물산이 아닌 삼성중공업이 건축한 초고층 건물로, IMF 시즌의 여파회복이 되지 않은 지라

부동산을 사면 그야말로 바보 소리를 듣던 때다.

삼성중공업 임원들이 미분양 물건을 죄다 떠맡게 되었는데 우리가 매수한 물건도

모 임원분의 애환이 담긴 물건이였다.

정작 사자고 했던건 나인데 임원분께서는 옆에 있는 어머니께만 연신 고맙다고 절을 하였다.

코흘리개가 무슨 부동산을? 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다.

아무튼 전국민이 축제 분위기였던 2002년 월드컵의 뜨거운 열기와는 별도로

나는 부동산 공부와 대학교 입학을 위한 공부에 정신이 없었고, 축제를 즐길 여유는 없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덕에 '성균관대학교 공과대학'에 03학번으로 입학에 성공하게 된다.

SKY[서울 연세 고려] 대학 같은 일류대는 아니지만,

공업계고등학교 출신의 부실한 기초와, 공부에 몰입한 기간이 짧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름 괜찮은 성과였다.

아마도 절실하게 무언가를 갈구하며 집중을 하면 하늘에서 '운' 이란 것도 내려줄 때가 있다는 좋은 경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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