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경험 시리즈 3탄 - 중학교 시절의 재테크 02
지금 생각해보면 노원구 하계동에 있던 시영아파트는 정말 재건축 하기 딱 좋은 아파트인것 같다.
그지같이 생활해도 머라하는 사람은 없으니 마음은 편했고
매우당연하게 학업성취도는 최하위를 달렸다.
공부를 안해도 딱 하나 과학 관련 교과목만 점수가 높았고 나머진 다 최하위........
이공계 공돌이 적성이 이때부터 나타났다.
중학교 2학년으로 있었던 97년 가을쯤 되서 너무 그지같이 산다는 소식을
생모께서 인맥을 통해 전해듣고 나를 만나러 오셨다.
그당시 어머니께선 열씸히 살면서 재산분할 시 딸려온 악성부채를 갚고
팔리지 않았던 반포동 삼호가든 29평, 오류동에 있는 단독 다가구를 정리한 후
개봉동 거성푸르뫼 51평짜리 아파트와 인천에 상가를 운영 중 이였다.
어머니 본인도 학벌이 제법 좋으신분이라 강남구 쪽에서 과외선생님, 학원강사로 있으면서 벌이가 나름 있으셨다.
어머니는 양천구 신월동 시영아파트라는 비좁은 아파트에 혼자 사셨었는데
여기도 지금와서 보면 대지지분 엄청 넓은 재건축 유망주이다.
맨처음 어머니께서 날 다시 데리고 왔었을때 내가 좋아하는 프라모델 비행기 2개를 사주시고
같이 침대에 잠들때 꼭 안고 잠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도 하나뿐인 아들과 헤어져 있을 동안 참 힘드셨으리라
그당시 난 할머니보다 프라모델 모형 더 사주는 사람이 생겼다는 순진하기 그지 없는 생각으로 마냥 기뻣다.
어머니가 준비한 로얄살룻 21년산을 선물받은 담임 선생님께선
이혼가정 아이인 나의 현 양육 책임자를 친부에서 친모로 바꾸는 확인 절차를 많이 도와줬고
아버지 또한 새로운 가정에 신경쓰고 있던 차에 내가 눈에 들어올리 없었다.
쿨하게 나를 어머니께 가도 된다고 허락하셨다.
또 다시 시작된 전학가기 이번엔 노원구에서 서울 반대쪽 끝인 양천구 신월동이였다.
도대체 교복만 몇번째 갈아입는 것인가........중학교 2학년 가을학기 중에 이동이기에 날씨가 조금씩 차가워졌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97년 11월 우리가 다 아는 IMF 외환위기 가 시작되었다.
나는 그당시 담임선생님께서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가정에 문제가 없는지 설문지 조사가 시작된걸 기억한다.
사업이 망해 자살했다는 가정부터 부모님이 직장에서 잘려 가계가 어려워진 가정이 속출했다.
뱅크런 이란 단어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도 그때 부터이다.
달러 환율은 2000원을 돌파하고 사람들은 은행에 맡긴 예금을 찾기위해
새벽부터 은행 앞에 진을 치고 돈을 빼냈다.
이것을 당시 뉴스에서 뱅크런으로 묘사하였고,
얼마안가 은행에 맞겨둔 돈을 못찾고 전재산을 날린 사람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은행에 전재산 수억을 맡겨둔 상태에서 간신히 돈을 찾아봤자 예금자 보호법에 의거 5천만원 까지만 보상되었다.
우체국 정도나 전액이 보호 되었었다.
이때부터 은행 한곳에 5천만원 이상 예금은 위험하다,
목돈은 우체국에 예금 하는게 가장 안전하다 라는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학원 강사와 과외강사로 활동하시는 어머니는 그나마 교육관련 일거리가 있었고
대출같은 부채도 없었고 은행에 맡겨둔 돈도 별로 없었으니 그나마 상황이 나았지만
매일같이 새벽 2시 이상되어야 집에 오셨다.
특히 고등학생 대상으로 교육을 하셨으니 고3 스트레스를 한몸에 다 받으셧던 것 같다.
애 교육을 떠나서 애가 밥은 잘 챙겨먹는지 신경쓸 겨를도 없었다.
계속 혼자 지내기 뭐하니 가끔씩 어머니를 따라 강남구 학원가 또는 목동 학원가에 가보기도 하였다.
부모님들이 자식 교육을 오래간 포기하다시피 한 상태에서 이제와서 학군지 학원가를 따라가본들
내 스스로 공부에 대한 모티베이션을 전혀 찾질 못했다.
그저 열씸히 돈 모아서 프라모델 모형을 사서 만드는 일이나 했으면 좋으련만
IMF 시즌이 시작되고 몇달 뒤,
전에 노원구 중계동에 살때 친하게 지냈던 잘사는 친구녀석에게 연락이 왔다.
자기 아버지께서 건설사업이 망해서 여기저기 압류가 걸려 살던 집을 팔고 좁은데로 이사간다는 것이였다.
하계동 시영아파트에 15평짜리 좁은 곳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같이 살던 나에겐
그친구네 대궐 같이 넓은 집이 너무 부러웠지만
갑자기 제일 친하게 지냈던 잘사는 친구놈네 집안이 어려워졌다니 충격이였다.
기껏해봐야 중학생이였던 우리들에게 가장에 대한 경제적 사망선고가
부모님 뿐 아니라 남은 가족들에 미치는 피해를 우린 알 지 못했다.
그당시 TV를 보다 보면 언론마다 금모으기 운동을해서 몇달러를 확보했느니,
집에 있는 금수저든 뭐든 다 가져와서 금을 모아 한국 경제 살리자고 말들이 많았다.
메달리스트 운동선수의 금메달 부터 결혼반지, 금목걸이 등 국내 온갖 금들이 다 모여
200톤이 넘는 금이 모였다고 언론을 통해 보도된 것이 기억난다.
친구놈 집안도 어려운 마당에 아버지께서 나라를 살려야 내 사업도 잘되지 않겠냐고
집안내 있는 금붙이는 싹 다 긁어서 은행에 가져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수많은 금을 헐값에 국민들로 부터 사들여 대체 어디로 흘러갔는지.........
경제에 관심을 둔 이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IMF때 금으기 운동의 목적은 한국은행 금 보유고를 늘려 그것으로 외환보유고를 늘린다는게 표면적 이유였으나,
정작 IMF를 발생시킨 장본인인 재벌들이 그걸 또 헐값에 떼와 팔다 부가세를 탈루했었다.
위기상황에 협조하는 국민들을 언제까지 이리 만만한 존재로 여기고 희생을 강요당하는건지 안타깝다.
우리 스스로 똑똑해 져야 더이상 당하지 않을것이다.
IMF시즌 시작으로 부터 약 10년뒤,
내가 육군학사장교 50기로 3사관 학교에서 훈련받던 2007년 가을,
즐겨보던 신문 경제란에서 이 금모으기 운동의 실체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국민들이 금을 내놓아 나라를 살리려 할 동안
높으신 정치인 분들은 공적자금을 빼돌리거나, 자녀를 이중국적으로 만들어 군대면제를 시키거나,
몇몇 대기업은 이 금모으기 운동 성금으로 탈세한 사실이 보도 되었다
그것도 절묘하게 공소시효가 끝난 다음에.........
2002년부터 부동산 관련 투자를 배우면서 알게된 또 하나의 사실은
IMF 시즌 당시 현금경색에 빠진 사람들의 좋은지역의 건물, 아파트는 헐값에
외국인들........특히 검은머리 외국인이라 불리는 한인교포 즉, 2중 국적자들이 많이 가져갔다는 것이다.
어떠한 가정의 평생의 노력이 담긴 그 등기권리증을 현금경색 때문에
타인에게 헐값에 뺃기고, 거리에 식솔들과 나앉는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나 피눈물나고 가슴 아픈일 아니던가
그것도 우리나라에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도 않은 외국인들에게 헐값에 뺃기게 되었으니
더욱 슬픈 일이다.
이제 국가 경제위기 상황이 다시온다면 과연 누가 희생해서 재산을 내놓겠는가 싶었다.
국가를 위해 내목숨을 초개처럼 바쳐야 한다는 사관학교의 교육도 갸우뚱 해지는 순간이였다.
정작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해야 할 높으신 분들께서는
없는 것들 목숨과 피를 빨아 몸을 불리는건 예나 지금 이나 똑같구나 젠장..........
그렇게 IMF는 우리나라 산업과, 건설업, 채용시장, 자산시장 그리고
우리의 실생활에도 큰 상처를 입혔다. 아마 이때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에 입학한 나보다 형님들께선
폭락하는 현물자산에 신음하는 부모님들을 직접 봤으니 당연히 부동산이란 것이 멀리 느껴질 수 밖에
97년 11월 IMF시즌 이후 다음해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당장 공부보단 일을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내 어머니 또한 쉬는날 없이 돈벌어 잘살아보자 하는것에 나도 기여를 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인문계 고등학교 보다 실업계 고등학교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마침 나의 중학교 성적이 그래도 실업계 고등학교에선 양호한 성적이라 학비지원까지 받는 조건이기에
일이 바쁜 어머니와는 상의없이 서울에 있는 공업계 고등학교 한곳에 지원을 하게 되었다.